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간이 행하고 알고 욕망하고 생산하는 모든 것은 그 사람이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이해심리학이라 칭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해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기본 특징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스스로 자신의 이해를 이해하고 자신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자기성찰은 이해가능한 인간 정신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므로 자기성찰은 앞에서 말한 내용적 형식적 이해 가능한 연관관계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자기성찰은 그 시작부터 교착상태에 빠질 수 있다. 세계 속의 행동과 사물에 대한 지식은 대체로 무의식에서 수행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기성찰 없이 수행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정신활동을 비로소 인간화시키는 것은 자기성찰의 시작과 그 가능성이다. 이해심리학은 그 자신이 스스로 수행하는 자기성찰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심리학자로서 타자에 대해 그가 자신의 자기성찰에서 아직 수행하지 않은 것을 수행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타자의 자기성찰을 이해하며 참여하고 또한 촉진한다. 자기성찰은 의식과 무의식의 포괄적인 관계 속에 있다. 우리는 우선 성찰이라 불리는 것의 범위 전체를 고려해보기로 한다. 성찰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 분열될 때 분명해진다. 정신생활의 모든 현상은 주체와 객체로 분열되면서 명백해진다. 우리가 느끼고 체험하고 추구하는 것은 이미지와 상상으로 우리에게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상화 형태화 사고와 요컨대 명백함은 객관화에 있다. 이 같은 분열 속에서 또 다른 성찰이 발생한다. 나에 대한 성찰인 자기성찰을 수행함으로써 나 자신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내용에 대해 성찰하며 또 내가 무엇보다 객체로서 아무런 의식 없이 속박된 이미지와 상징들에 대해서도 성찰하고 또 그것들이 무엇인지 자문한다. 의식은 무한정 상승하여 의식 자체의 의식에까지 이른다. 최종적으로 나는 전체 속에서 벌어지는 주체와 객체의 분열에 관한 성찰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존재의 현상 양태가 분열 속에서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을 나는 철학적 초월 속에서 의식하게 된다. 모든 성찰에서는 지금까지 무의식적이고 모호했던 것을 해명함으로써 해방감을 얻는다. 그리하여 비 분열성 비분 화성으로부터의 해방 나의 주어진 본질로부터의 해방 나를 생각 없이 강요하는 상징에의 동화로부터의 해방 객체의 절대적 현실로부터의 해방이 되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은 모두 무엇을 위한 해방인가를 질문하게 한다. 나는 대상을 붙잡는 순간 비분 열, 미분화라는 어두움 속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그때까지 단순히 느끼기만 한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구원과 같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알 때 비로소 맹목적으로 압도되는 것과 대조되는 자유로움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존재하는 객체로 나 자신을 만들 때 내가 생각하게 되는 주어진 나의 존재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진다. 그것은 나 자신이 된다는 과업을 위해 자기성찰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궁극적 소여 대신 나는 가능성을 획득한다. 다시 말해 나는 상징에 속박되는 대신 상징에 대한 지식을 통해 상징을 자유롭게 변용할 수 있다. 비록 내가 현존하고 있는 객체에서 이른바 절대적 존재에 구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나는 현존의 현상적 특징에 대한 의식으로 무장하고서 초월한다. 그 초월의 대상은 없지만 대상적 가능성 전체의 길을 통해서만 명백해지는 존재 자체로 초월하는 것이다. 모든 해방은 위험을 의미한다. 성찰을 통한 이 모든 해방은 다음과 같은 경우 지반 상실에 이르며 또한 물질 대지 세계를 상실하게 한다. 즉 해방을 향한 모든 단계에서 변화하는 속박이 해방의 확장과 더불어 머물러있지도 않고 상승하지도 않을 경우 또 대상화 과정에서 근원으로서의 포괄적 어두움을 느낄 수 없을 경우 또 자아실현의 과정을 통해 현존의 나에게 주어진 것을 인수하고 습득하지 못할 경우 또 속박하는 상징을 극복하여 전체의 상징적 본질이 인생을 이끌어가지 못할 경우 또 초월의 과정에서 단호히 세계 존재 속으로 완전히 참작하지 못할 경우 등이다. 자유를 요구하는 부유 상태는 그것이 속박 속에 머무를 때 즉 나의 날개가 공기 없는 공간 속에서 공기 저항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만 그 지반을 상실하지 않는다. 심리학적으로 지반 상실은 무의식의 소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나는 무의식에서 시작하여 의식의 모든 단계에 걸쳐 생활하고 있다. 무의식은 나에게 언제나 충동 재료 내용을 가져다준다. 무의식은 나에게 수행을 가능케 하는 곳에서 일상적이고 자동화된 생동에서 시작하여 창조하는 형상화와 고안해내는 사고의 착상에서 그리고 내 자유의 본질을 부여하는 열심히 있는 곳에서라면 항상 나타난다. 모든 명료화는 명료해지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우리는 무의식과 의도 사이에서 결코 단순한 반대 관계 속에 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의 정신적 지적 현존에 걸쳐 무의식과 의식 간의 단계화된 등급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 상상할 수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결과는 정신생활의 쇠약 쇠퇴 파멸이다. 명백한 지식 속에 존재하는 위대하고 눈부신 의지의 힘은 여전히 무의식이다. 또한 이 의지가 끊임없는 실현이라면 이것은 인간의 끝없는 명료화 과정에서 전진의 한 단계이다. 인간의 명료화는 무의식의 왕국을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을 통해 무의식을 끝없이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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