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성찰의 구조는 단계적이다. 유일하고도 명백한 자기성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관찰 나는 나 자신 속의 과정들 나의 지각방식 기억 및 느낌 방식 등을 인지한다. 나는 사라지는 휘발성의 관찰로부터 항상 빠져나가는 현상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확인한다. 나를 관찰하는 나와 나를 낯선 객체인 양 관찰하는 나 자신 속의 무엇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한다. 나는 소여물을 대하는 것처럼 중립적 태도를 취한다. 자기 이해 나는 내 속에서 발생하는 것을 동기와 연관관계로 해석하고 이를 통해 해명하려 한다. 관찰의 수준에서 이 같은 자기성찰이 이루어질 경우 많은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해적 해석은 나 자신에게 해당하는 경우에도 무한하고 항상 상대적이다. 마지막에 가서도 나는 내가 누구이며 나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동기가 결정적인지를 알지 못한다. 가능하나 그 모든 것은 내 속 어디엔가 아마도 숨겨져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밝힐 가능성은 있다. 단순한 지식 욕구는 자신을 이해할 근거를 상실하게 한다. 자신을 드러냄. 수동적 자기 이해는 실제적 자기 개시를 위한 매개체를 제공한다. 본래의 자기 개시는 우리가 철학적으로 범주를 긋는 활동에서 비롯된 당혹감의 진지함을 통해 일어난다. 이 활동들은 심리학적 확인을 피해 가는 반면에 자기 이해. 자기 은폐 및 도착의 위기들은 다시금 심리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이해 매개체의 개념적 구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를 촉진할 수 있게 한 업적에서 키르케고르를 능가할 자는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정신병리학의 관심거리가 될 만한 몇 가지 구분을 언급하기로 한다. 자신을 드러내기란 단순한 바라보기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내적 행동이 내가 드러내도록 한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지 않는 은폐 시도는 가상스러운 드러내기 부끄러움을 모르는 내적 자아의 폭로 파렴치한 자기 고백 끝없는 내성과 자기 묘사 내적 사건 관찰의 도취로 덮일 수 있다. 자신을 드러냄이란 자연에 관한 인식과 같이 객관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 행동이며 오히려 이것은 자기 자신 파악 자기 선택 전유인 것이다 가혹한 진실에 대한 자유로운 추정적 진술에는 사이비 정직만이 있을 뿐이다. 진술의 고정된 속성 그 자체에 이미 허위가 존재한다. 자신을 드러내기에서의 정직성은 깊고 단순하며 효과적인 만큼 소박하다. 자신을 드러내기는 자기 존재에 나타난다. 자기 존재는 결코 객체 존재가 아니다. 대상으로 인식되고 확정되며 명백해지는 것은 결코 본래의 나 자신이 아니다. 자기 존재의 근본 관계는 자신에 대한 자신의 관계 다시 말해 정신적 가공 내적 행위 결단이다. 자기 이해에서 궁극적 지식 욕구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출발이다. 실존주의적 결단의 절대적 성격은 가능한 해석의 무한한 유동성에서 나타난다. 실존적으로 정상적이라면 모든 것은 인식의 측면에서 부유 상태에 있다. 이미 수행된 것은 이것이든 저것이든 당분간은 확실하지만 또다시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근원의 통일성은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알 수도 없다. 또 근원에서 유래하여 현상을 통해 그 현상을 인도하는 노선 역시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알 수도 없다. 그 이유인즉 이 인도하는 근원이야말로 모든 지식을 움직이고 인도시키며 그 지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지식 속에서 발현되기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자기성찰의 경로와 내용을 추적하는 대신 여기에서는 정신병리학적으로 눈에 띄는 일례들을 선택해본다. 정신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반대 쌍 중 하나가 자의적 행동과 비자의적 생성 자의와 사건 사이의 상대성이다. 자의는 성찰에서 생겨난 의도성이다. 정신의 모든 풍부 모든 충만 모든 내용은 자의의 바깥에 존재하는 소질에 좌우한다. 그 소질은 재능 욕도 감정의 소지 가소성 등이다. 자의는 오로지 제한하고 선택하며 제지하고 자극한다. 자의 없는 정신은 영혼 없는 인생처럼 목표 없이 무의식적으로 성장하고 전개한다. 자의는 그것에 자극을 주거나 억제할 수 있는 충만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이룩할 수 없다. 그런 자의는 말하자면 빈 기계처럼 공회전만 할 뿐이다. 자의의 영향은 의식적 사건을 넘어선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의도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날 수 있고 의도적으로 잠들 수 있다. 의도와 단순한 사건의 상호관계가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은 건강한 정신생활의 표시이다. 비자의적 사건이 독자적으로 되며 이에 대한 의지의 영향이 줄어드는 만큼 우리는 종종 병적으로 평가되는 현상의 근거를 묻게 된다. 자의와 그 영향은 존재하지만 의해 움직여지고 억제되는 정신적 소질이 미미한 경우 우리는 정신적으로 빈약한 인간을 언급하게 된다. 우리가 히스테리적이라고 알고 있는 육체에 대한 정신의 영향은 그것이 완전히 자의의 손에 있을 경우 아직은 병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 근본 지식에의 참여는 인간을 이해하는 데서 필수적이다. 이것은 눈앞에 보이는 복잡한 현상 덩어리와 잡담에 불과한 덩어리 이면에 숨어있어서 획득하기가 매우 힘들다. 인간의 사고와 사고 운동의 이해는 한편으로는 한 인간의 간과할 수 없는 견고성과 한계 내적 안전함과 궁극성을 가르쳐주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오로지 역사적 구체화 속에서 일반화 없이 자유로운 개방을 주장할 때 심연의 위험과 현실을 가르쳐준다. 이 공간에서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보는 방식이 확실해진다. 인간은 결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으며 각각의 표상이라는 끈에 이끌려 자신에 대한 도식을 만들어낸다. 그렇지 않고 이와는 다른 상태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열어놓음으로써 이해 가능성의 넓이와 깊이 및 가능한 해석 속에 스스로 열려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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